Letter/Precious

© ohmyfilmbonita

 
 
 
  “니코리……?”
  “…….”
 
 
  츠유하라 히마리가 문득 뒤를 돌았을 때, 거기에는 과거가 있었다. 아주 어릴 때 영문도 모른 채 고통스러웠고, 또 영문을 모른 채 멀리 떠나 온 자신의 옛 단편들이.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잊혀져 가던 빛바랜 이름이 낯선 목소리를 타고 귓가로 흘렀다. 해가 저물어 캄캄하게 물들기 시작한 저녁 하늘, 하나둘 불이 켜지던 시끌벅적한 거리에서 홀로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히마리는 기나긴 찰나 속을 헤엄쳤다. 츠유하라로 살아가고 있던, 그러나 언젠가 아이카와였던 그 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존재를 마주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은 꼭 한 편의 촌극을 닮아 있었다. 말간 얼굴 위로 의문이 들어차던 순간. 히마리는 습관처럼 잠시 숨을 들이켰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아, 당신이 내…….
 
  부드럽고 온화한 갈색빛 머리카락이 초가을 밤공기 너머로 불어온 바람에 천천히 흩날렸다. 꼭 운명이 재생되듯 호흡마저 가라앉아 시간은 느리게만 흐르는 것 같았다. 바다를 닮은 새파란 눈동자도, 유순한 눈매가 표정마저도 전부 찍어낸 듯 닮아 있던 여자의 시선이 히마리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닿아 있었다. 좀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는 악몽으로조차 등장하지 않는 낡은 기억일 뿐이었는데. 좀처럼 기억나지 않던 장면들이 그제야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천천히 이어질 뿐이었는데. 세 살 즈음으로 돌아간 듯 온몸이 굳어 발 아래로 뿌리를 내린 것처럼 걸음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자신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야윈 주먹을 쥐고 어설프게 마구잡이로 내리치면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여자가. 세 살의 히마리를, 아니, 니코리를 내리치던 폭력적인 손길이. 너 따위 낳는 게 아니었어. 그렇게 말하던 그 애의 친모가.
 
  히마리, 거기서 안 오고 뭐 하는 거야. 밥 먹으러 가자며. 히마리, 안 들려? 너 같은 건 낳지 말았어야 했어. 너 같은 걸 낳아서 내 인생이 전부 엉망이 된 거야. 얘, 니코리. 혹시 누가 괴롭히지는 않니? 저번에 봤을 때 상처들이 너무 많던데. 혹시 엄마가 술을 많이 마시거나 널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상황이시지는 않니? 제발 죽어. 제발. 사라져 버려. 내 인생에서 영영 꺼져 버리라고. 어지러이 뒤섞이던 현실과 과거의 편린들이 히마리의 뇌리를 파고들듯 헤집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주한 엄마는 짧고 빛바랜 기억 속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니코리, 맞지? 성큼성큼 다가오던 걸음에 히마리는 습관적으로 숨을 참아야 했다. 엄마는 여전히 화가 난 얼굴로, 어쩐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넌 아주 잘 살았나 보구나. 이런 헤픈 여자들이나 입는 옷을 입고 말이야. 아, 시작됐다.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던 오랜 슬픔이.
 
  카즈토라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지나온 길을 큼직한 보폭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길가에 붙들려 있던 히마리의 맞은편에는 어쩐지 그 애와 너무 닮아 있던 애매한 나이의 여자가 서 있었다. 아주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카즈토라는 아이가 있는 어른들의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저건 자식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부모들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다가가자 희미하게 들려 오던 말소리가 성가실 정도로 커다랗게 귓가를 맴돌았다. 익숙한 불쾌함을 닮은 소음이었다.
 
  안 봐도 뻔하지. 이 늦은 시간까지 이런 남자애와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면. 어깨를 밀치던 손길이 조금은 거칠었다. 화가 나 숨이 찬 듯한 목소리로. 날카롭고 경멸스러운 눈으로 카즈토라를 올려다보고서는. 이런 질 낮은 애들이랑 어울려 다니는 걸 보면 넌 천박한 네 아빠를 닮은 거야. 어디서 이런 징그러운 게 태어났을까? 나는 너를 낳고 인생이 엉망이 되어 버렸는데. 조소 섞인 말들이 히마리를 겨냥한 채 말릴 새도 없이 날아들었다. 넌 네 엄마를 바보로 만들었어! 폭언들을 줄줄이 내뱉던 여자가 격앙된 말투로 습관처럼 손을 치켜드는 순간까지도 히마리는 습관처럼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악의를 가진 손끝이 날아드는 순간을 두 눈으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줌마, 지금 뭐 하는 거야?”
  “얘, 넌 뭔데 어디 어른한테…….”
 
 
  지금 이 애 때리려고 한 거야? 히마리에게로 날아든 손목을 붙든 손끝으로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카즈토라의 샛노란 눈 위로 익숙한 적의가 잔뜩 차올라 있었다. 히마리와 꼭 닮은 얼굴, 이 폭력적인 여자를 알고 있는 듯 잔뜩 얼어붙어 있던 어깨와 피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질끈 감은 눈, 다섯 살 터울의 죽은 자매를 기억하지 못하던 히마리와 특정 시기의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 어린 시절의 앨범. 이 뭣같은 상황으로 꽤나 오랜 의혹이 눈 녹듯 사라져 갔다. 진상을 파헤치고 나니 남은 건 뻔한 분노뿐이었다. 당신 같은 것들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알아. 자기 인생이 엉망진창으로 꼬인 게 전부 자식 탓이라고 생각하는 쓰레기 같은 부모들 말이야. 아줌마 인생이 엉망이 된 건 다 아줌마 때문이야. 애꿎은 데에 화풀이하지 말고 가서 기도라도 드리지 그래. 내가 신님이었다면 절대로 아줌마를 구원해 주지 않겠지만 말이야…….
 
  카즈토라는 제가 움켜쥐고 있는 이 손을 알고 있었다. 핏발 선 눈동자와, 격앙된 목소리와, 난폭한 시선을. 제 배로 낳은 것들을 때리려 치켜든 손을, 걔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붙들고 있던 팔목을 억세게 뿌리친 뒤 히마리를 데리고 커다란 보폭으로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그 여자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공포 영화를 보거나, 자신이 실컷 싸우다 어딘가 다쳐서 마주쳤을 때면 히마리는 꼭 두렵다는 듯 울음을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그게 카즈토라가 알고 있는 히마리의 두려움이었다. 카즈토라는 징그러운 부모들을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 표정의 히마리는 알지 못했다.
 
  그런 히마리는 처음이었다. 창백하게 질려 있던 얼굴로 얼어서는 움직이지 못할 만큼 굳어 있던 츠유하라 히마리는.

 
 
*
 
 

  히마리는 귓가를 어지럽게 부유하던 심장 소리를 가만히 곱씹었다. 마음을 추스르려 해 봐도 얇은 살가죽 안으로 파장처럼 밀려 오던 불안정한 맥박이 자꾸만 히마리를 좇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중학생이고, 엄마를 마주친 건 순전히 우연이고, 더 이상 그 집은 우리 집이 아니야. 의연한 척 입을 다물고 아무리 소용없는 생각들을 떠올려 보아도 차마 제 손을 잡고 도망치던 남자애의 옷깃을 붙들지 못한 손끝이 얕게 떨렸다. 카즈토라 군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저 상황 속에서 벗어날 수나 있었을까? 다시 그 집에 가게 됐을까? 엄마는 또 나를 때렸겠지? 미워했겠지?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 일들과 선연하게 눈앞에서 그려지는 일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머릿속은 꼭 겨울날의 창밖처럼 희뿌옇게 번져드는 것만 같아 히마리는 결국 질끈 눈을 감았다. 거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골목에 다다른 뒤에야 멈춘 걸음이 조금은 고마울 지경이었다. 울렁울렁 토기가 슬픔과 함께 밀려 왔다. 도무지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자꾸만 히마리의 삶을 뒤흔들던 한때.
 
 
  “카즈토라 군, 미안해. 나 때문에 그런 말을 들어 버려서, 기분이 나빴다면 대신 사과할게. 저 사람은, 그러니까…….”
  “히마리.”
  “일부러 나 때문에 같이 나와 준 건데, 내가, 다…….”
 
 
  풀이 죽은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아,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좋지. 카즈토라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화가 난 표정으로 싸늘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샛노란 눈과 마주한다면 마음이 정말로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꽉 쥔 주먹 안으로 새하얗게 질린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나랑 멀어진다고 해도 괜찮아. 네가 나한테 화가 났어도, 실망했어도. 내가 비밀을 만든 탓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니까. 그러니까, 네가 나에게 완전히 질려 버린 탓에 멀어지기를 선택해도 나는 너를 절대로 원망할 수 없어. 끝을 모르는 우울이 해일처럼 커다랗게 마음을 덮쳐 오는 것만 같았다. 내가 정말 무서운 건, 카즈토라 군. 네가 나랑 언니를 겹쳐 바라보는 상황뿐이니까. 네가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히마리가 아닌 다른 존재로 바라보는 것뿐이니까. 그건 정말이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슬플 것 같았다. 엄마를 만났을 때보다 더. 먼지 쌓인 기억이 생생하게 재생되던 순간보다도 더욱.
 
 
  “그러니까, 카즈토라 군. 나 때문에 화가 났다면…….”
  “어이, 히마리.”
 
 
  작게 달싹이던 잇새로 탄식 같은 숨이 새어나왔다. 가느다란 불안정의 기로 위에서 휘청이며 걷는 사람처럼 히마리는 카즈토라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자꾸만 입술을 잘근거렸다. 불안한 듯 횡설수설 이어지던 말끝이 흐릿하게 번져드는 순간마다 카즈토라는 그 애의 이름을 불렀다. 히마리. 나지막하게 불러 본 이름이 귓가로 닿지 않는다는 듯 시선을 내리깐 채 숨을 작게 헐떡이던 히마리의 소라색 눈동자 위로 짙은 감정들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것의 이름은 슬픔이었다. 지금은 제 어떤 말도 들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잠잠하게 밀려들었을 즈음, 카즈토라는 주저없이 히마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연약한 입술이 맞닿는 순간, 그렇게 슬픔은 사라지고 세상이 정지하는 것만 같던 그 저녁. 가로등 불은 깜빡거리고, 우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는. 아, 정말이지. 너나 나나 슬픔을 성숙하게 해소하는 법은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지도 몰라.
 
  맞닿은 입술에 히마리는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이 맨질한 눈동자 위를 오갈 때마다 시야는 조금씩 선명해졌다. 탁한 부유물처럼 삶 위를 빼곡하게 뒤덮고 있던 우울이나 불행 따위는 도시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듯, 푸르른 눈동자 위로 들어찬 건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그 단순하고 투박한 행위에 아무런 의미조차 담기지 않았더래도 츠유하라 히마리는 하네미야 카즈토라와 또 한번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카와 니코리로 불렸던 여자애는 불행의 파편으로 자라 온 그 남자애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놀란 듯 커다래져 있던 눈동자 위로 들어찬 건 오로지 열렬하지는 않던 시선과 소년. 하네미야 카즈토라만이 그 앳된 시야 속에 여전히 유일했다.
 
 
  “…… 어?”
  “이제 집중해 줄 수 있어? 나한테 말이야.”
 
 
  영원 같은 찰나의 끝, 부드럽게 맞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지자 시선이 마주쳤다. 고개를 들어올린 히마리의 말간 뺨 위로 스며든 열기가 은은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놀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카즈토라를 바라보던 히마리의 허리를 감싼 큼직한 손이 여전히 떨어질 줄 모르고 살갗 위를 배회했다. 짧은 입맞춤에 아쉬움이 일렁이던 순간마저도 카즈토라의 집요한 시선은 히마리의 푸른 눈동자 위로 닿아 있었다. 역시 불행과는 어울리지 않는 눈이다. 불완전할 수는 있어도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휘청이기에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눈이다. 니코리와 히마리. 히마리와 니코리. 츠유하라가 아니던 히마리. 그 무엇도 상관은 없었다. 너 이외의 다른 것들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이 느릿하게 달싹였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던 그 애에게서 언젠가의 자신을 겹쳐 바라봤던 건지도 모른다.
 
  아빠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카즈토라는 끝과 시작을 모를 어둠 속에서 이명이 울려퍼지는 듯한 불쾌함을 느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주 오랜 시간 그 남자는 카즈토라의 불유쾌함이었고, 언젠가는 불면이었으며, 또 그 어떤 때에는 불안정의 조각이었다. 사랑받고자 몸을 웅크릴 때에도, 상처받지 않고자 어깨를 굽히고 고개를 숙일 때에도 그는 일련의 의문으로 남아 카즈토라의 시시한 일대기를 뒤덮고는 했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쯤이던가. 아버지를 만난 적 있었다. 목에 호랑이 문신을 새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멀찍이서 제 자식을 알아본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우악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말했었지. 불량한 것들과 어울려 다니는 거냐? 네 엄마는 아무런 말도 안 해? 언제나 그랬듯 매정한 어른의 표정을 하고는 카즈토라의 덜 자란 팔을 잡아끌던 그는 유달리 커다래 보였다.
 
  어디로 가는 건데! 악을 쓰며 묻자, 카즈토라의 불쾌한 조각은 말했다. 이런 바보라도 엄마라서 친권을 준 거야.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간다. 아, 그 순간 재생되어 버리는 거야. 무릎을 꿇은 엄마, 비슷하게 엉망이 되어 닮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 그리고 우리를 내려다보던 아빠. 아버지. 어떤 우스운 남자. 웃기지 마. 당신 멋대로 우리를 그렇게 내려다보지 말라고. 웃기지 마. 웃지 마. 그렇게 웃지 마, 당신.
 
  카즈토라는 한때의 기억을 떠올리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됐더라.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쉬지만 기어이 꺼내 기억하고 싶지는 않던 이야기들이 어스름한 빛을 띄며 되살아났다. 그 성가신 과정을 무시하듯 카즈토라는 히마리의 새파란 눈동자 위로 뛰어들었다. 놀란 듯 커다래져 있던, 자신을 바라봐 주던 그 눈을. 히마리의 새파란 눈 위를 빼곡하게 뒤덮던 슬픔이 사라져 있었다. 카즈토라는 그 여자애의 색으로 물든 안정이 좋았다. 배기음이 울려퍼지던 그의 도시는 언제나 소란스러웠다는 이유만으로. 도쿄를 물들인 밤, 미움과 소음, 빼곡하고 짙은 감정들과 선택. 좋아하거나 미워하거나. 둘 다 선택할 수는 없어. 이명처럼 머릿속을 파고들던 시끄러운 감정들도 히마리의 곁에서는 잠이 드는 것만 같아서. 이 안정에 오래오래 기대 있고 싶었을 뿐이야, 단지.
 
 
  “네 탓이 아닌 게 당연하잖아. 저 아줌마가 이상한 거라고. 너한테 화낼 필요 같은 거 없거든.”
  “…… 고마워. 구해 준 것도, 그렇게 말해 준 것도 전부 다.”
 
 
  어설픈 나름의 위로가 마음에 들기라도 한 건지, 히마리의 말간 뺨 위로 작은 미소가 번져들어 있었다. 그 순간이 좋아 카즈토라는 히마리의 시선 끝에 조금 오랜 시간 머물러 있기를 선택했다. 저 미소의 의미를 곱씹으면서. 아, 기억 났다. 그 화가 난 아줌마의 얼굴을 떠올려 보니. 열두 살의 카즈토라를 끌고 걸음을 옮기던 그의 오랜 불면이 쓰러진 건 마이키가 나타났을 때였다. 무적의 마이키. 누군가는 마이키를 그렇게 불러 왔다지만,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한 순간은 그때였다. 마이키가 지키고 있는 것들은 결코 지지 않는다. 그 상대가 커다란 또래이든, 한 번도 작게 느껴진 적 없던 집단이든, 어쩌면 그의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구하러 왔어. 자신만만하게 웃던 마이키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부서져 흩어졌다. 사노 만지로가 남기고 간 흔적들 중 유일하게 카즈토라의 기억 속에서 온전히 남아 있던 순간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좋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냐. 그때는 구원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지금의 마이키는 무찔러야 하는 적일 뿐이었으므로. 마이키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뒤죽박죽 엉망으로 뒤섞이던 기억들은 탁한 색으로 바래어져 있었다. 한때는 친구였겠지만 지금은 친구일 수 없었다. 다른 녀석들도, 도만 같은 애들 소꿉놀이도. 사노 만지로의 가장 소중한 걸 부수었으니. 용서받을 수 없다면 선택하면 돼. 좋아할 거야, 미워할 거야? 사랑받을 수 없으니 미워하기를 택했다. 소년의 단순한 세상이란 어쩌면 선택의 연속성으로 유지되어 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카즈토라는 가만히 인상을 구기고 떠올리고 싶지 않던 장면의 어지러운 동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의 그를 구한 것도 마이키, 언젠가의 그가 소년원에 가게 된 이유 또한 마이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소음 투성이의 세상. 그 지루한 도시 속에서 선명한 게 있다면 아마 단 하나. 츠유하라 히마리. 너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지. 너는 항상 나를 좋아해 줄 거지. 언제나 히마리는 그 물음에 답하듯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새파란 눈동자는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그 점이 좋았다. 히마리를 끌어안을 때면 느껴지던 어설픈 심장 박동, 입을 맞출 때면 굳어 버리는 어깨나 이윽고 자신의 목을 끌어안던 얇은 팔, 사랑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는 눈동자가.
 
  너는 참 나와 다른 존재구나. 너에게서 끝없이 정답을 갈구하는 순간마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았는데. 카즈토라는 느릿하게 히마리의 눈꺼풀 위를 쓸어내렸다. 말간 얼굴 위로 두려움의 늪에 잠겨 숨을 뻐끔거리던 히마리가 보였다. 하네미야 카즈토라가 알지 못하던 순간 속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처럼. 그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왜일까. 카즈토라는 그때 마이키의 등 뒤에서 그를 바라보던 자신의 얼굴 위로 웃고 있던 히마리의 기억들을 겹쳐 보았다. 아무런 힘도 없이 그저 그를 구원이라 받아들였던 유약한 순간 속 자신에게서. 마이키를 올려다보던 열세 살의 어느 불쾌함 속에서 츠유하라 히마리가 보였다. 나도 너처럼 두려운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낯설고 까무룩한 슬픔 속을 걷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히마리.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생전 처음 자각해 보는 감각 위를 걷는 듯한 착각이. 카즈토라는 할 말을 고르는 듯 조금 오래 히마리의 눈 위를 가만히 배회했다. 뺨을 지나 입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죽이고 또 되살렸는지 차마 헤아릴 수 없었다.
 
 

*

 
 
  “카즈토라 군 덕분이야…….”
  “있지, 그럼 마저 해도 되는 거지?”
 
 
  어쩌면 조금 마음대로 굴고 싶어. 그래도 되는 거지?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카즈토라 군은. 그 어쩐지 제멋대로 기댈 수 있는 품을 빌려주는 것만 같던 남자애는. 응? 하고 작게 되묻던 목소리가 끝맺음을 내기도 전에 맞물려 오던 입술에 히마리는 습관처럼 숨을 들이켰다. 아까보다 짙고 투박하게, 또 조금 더 깊게. 느릿하게 맞닿던 입술 끝에서 부서지는 숨이 좋아 히마리는 작게 호흡을 토해 내며 그 입맞춤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허리를 감싼 손끝이 살갗에 닿아 올 때마다 히마리는 굳은 어깨를 감추지 못하고 카즈토라의 목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놀란 눈을 깜빡이다 이내 눈을 감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런 이름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우리 사이와 입맞춤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이러면 안 된다며 어설프게 어깨를 밀쳐 보자던 그 지키지 못할 결심들도. 오늘만큼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카즈토라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제 오랜 첫사랑에게. 하나뿐인 츠유하라 히마리의 위로와 안정에게.
 
  기분은 꼭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빠르게 변해 갔다. 슬픔, 두려움, 불안감과 긴장감, 기분 나쁜 고양감, 그러다 결국은 안도감, 슬픈 색으로 물든 기쁨. 어쩐지 조금은 슬펐고, 또 동시에 기뻤다. 너만은 나를 제대로 봐 주고 있다는 생각에 심장은 느린 안도감을 곱씹듯 천천히 두근거렸다. 카즈토라가 자신의 기분을 나아지게 해 주려 선택한 많은 변수들을 히마리는 알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뛰어든 순간부터 자신의 손목을 붙들고 도망치던 순간까지. 투박한 위로를 건네고 입술을 맞댄 순간까지도. 카즈토라와 함께 있으면 츠유하라 히마리로 온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죽은 언니가 아닌, 사랑했던 어느 순간 속 존재가 아닌 그저 츠유하라 히마리. 아이카와 니코리도, 츠유하라 미유도 아닌 한 명의 인류. 츠유하라 히마리. 그 앳된 특별함 속에서 한여름 무더위 아래 맨질한 사탕처럼 녹아내리고 싶었다. 이내는 그런 마음으로 그 애는 눈을 감았다. 녹아내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혀가 느릿하고 끈적하게 뒤엉키는 동안에도 카즈토라의 손끝은 허리에서 어깨를, 또 뺨 위를 맴돌았다.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던 귓바퀴를 느긋하게 더듬는 손길이 유달리 짓궂고 집요했다. 그날 우리가 했던 게 첫키스는 아니었다. 종종 카즈토라는 장난스레 입술을 맞댔고, 어쩔 수 없는 욕심에 휩쓸려 히마리는 종종 카즈토라를 끌어안았다지만. 이 입맞춤은 꼭 우리가 서로의 삶에 이름을 각인하는 일인 것만 같아, 히마리는 카즈토라의 품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할 수 없이 그저 귓가를 울리던 고요한 심장 박동을 느꼈다. 파도처럼 울렁이던 마음 아래로 너와 내 슬픔이 모두 휩쓸려 사라지기를 바랐다. 기대고 또 끌어안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너의 어설픈 안정 위로 뛰어들고 싶었다. 다정하고 투박한 위로 속으로. 아, 역시 너를 좋아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입술이 떨어지자 눈꺼풀이 다시금 느릿하게 헤엄쳤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법한 거리에서 시선은 여전히 짧게 부서져 오래도록 이어졌다. 혀가 뒤엉키고 숨이 부서지는 순간마저도 네가 조금은 궁금했다. 어떤 마음으로 입술을 맞대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히마리가 알 수 있는 건 결국 카즈토라의 다정한 파편뿐이었대도. 여전히 제멋대로 이어지던 입맞춤, 답을 듣지 않았음에도 맞닿았던 숨과 짙고 길었던 키스, 처음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아주 오래 서로를 바라봐야 했다. 히마리의 나른한 눈 위로 앳된 감정이 서려 반짝이고 있었다. 누군가 지켜보았다면 분명히 너를 제멋대로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아냐. 오늘은 유달리 다정했는걸. 너를 아주 세게 끌어안고 있는 기분이었는걸. 카즈토라는 익숙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조금은 장난스럽게. 안 가? 어디로? 어디든. 뜻 모를 질문들이 좋아 히마리는 결국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입맞춤은 아주 오래도록 잊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터질 듯 물들어 있던 뺨 위로 애틋함이 스쳤다. 역시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슬픔이 해가 진 도시 속으로 숨어들던 순간.
 
 
  너는 세상에서 가장 불완전한 버팀목이야.
  나는 너에게 기대 세상을 표류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 담 글 커미션 님

DALB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