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Precious

언제나 날 걱정해 주는 히마리에게.

유난히 히마리라는 글자를 쓸 때 차마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갈하지는 않지만 어떻게 보면 나쁘지 않다 할 수 있는 필체가 그 부분에서 흩어졌다. 진정해, 카즈토라. 이제 초입부일뿐이야.

피의 핼러윈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에 제격이었다. 중학생 정도밖에 되지 않은 학생들이 싸움을 하다 그중의 하나가 칼부림을 벌이고, 그러다 다른 친우를 죽음까지 몰아넣다니. 군중들의 반응은 뻔했다. 가해자로 불리는 그 아이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그 아이의 이름 활자 하나 알지도 못하면서 가족까지 들먹이며 지옥에서 썩어 죽을 놈이라고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했다. 정작 지옥에서 썩어 죽을 놈은 영원히 10월 31일에 머물러 있는데.

당신들이 첨언하지 않아도 난 이미 지옥인데.

그 아이는 언제나 상냥했다. 놀이터에서 개미들을 죽이면 안 된다고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주던 애였다. 사람이 천성이라는 것이 있지. 카즈토라의 기억 속 츠유하라 히마리는 언제나 성선설에 가장 알맞은 인물처럼 행동하곤 했다. 그 애 주변에는 늘 사람들로 가득 찼다. 츠유하라 씨는 역시나 다정해, 츠유하라 씨는 나중에 꼭 뛰어난 인물이 되고야 말 거야.

그런데, 츠유하라 씨의 옆에 있는 그 애는 누구야?

그 아이, 가정폭력의 피해자, 지옥에서 썩어 죽을 놈. 그렇습니다... 저 하네미야 카즈토라는, 살인으로 인해 소년원에 입소하게 되었습니다. 10월 31일 이후로 카즈토라의 시간은 그대로 멈췄다. 그렇지만 카즈토라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를 것이다.

히마리의 시간도 그날 이후 멈춰있다고.

dear H(初恋)

© belonginkurage

카즈토라는 본인이 배정된 방에서 가장 많은 편지와 가장 잦은 면회 신청을 받았다. 다른 아이들은 전부 다 부모님이 찾아오곤 했는데, 카즈토라는 달랐다. 매번 카즈토라 군에게, 로 시작되는 편지나... 늘 그랬듯이 노란색 도시락통을 품에 안은 채로 카즈토라에게 찾아오는 사람 역시 히마리였다. 처음에는 도시락도 거들떠보지 않고 단답으로만 대답을 대신했다. 응, 오지 말라고 했잖아. 응, 걱정 마. 그만,... 그만하자. 히마리. 그럴 때마다 히마리의 표정은 미묘하게 굳어져갔다. 절대로 애정하는 이 앞에서 침울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다는 굳은 결심이었다.

카즈토라가 처음 소년원에 입소했을 때는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계절이었다. 그날따라 바람은 유난히 매서웠고, 더 이상 히마리가 발걸음을 옮겨 당도하는 종착지에는 찰랑거리는 귀걸이의 소리도, 마치 호박을 소장한 듯한 노란색 수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마다 히마리는 더더욱 본인을 북돋으려 노력했다. 도시락 속에 담긴 반찬의 개수는 점점 늘어나고, 면회를 가기 전날 장을 보는 건 자연스러운 루틴이 되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정갈한 필체로 본인의 진심 꾹꾹 눌러 담은 편지를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즈토라 군과 나는 지금 당장 함께할 수 없지만, 언제나 카즈토라 군의 힘이 되어주고 싶어. '사랑해'라는 말은 쓰이지 않았지만 카즈토라는 알 수 있었다. 히마리가 보내오는 모든 편지는, 카즈토라를 향한 순수한 애정을 꾹꾹 눌러 담고 있다는 것을. 벅차올라 직접 얼굴을 보고 하지 못한 고백이 활자 하나하나에 담겨서 도착하는 거라고. 나는 너에게 모진 말만 했는데, 너의 말은 사랑을 담고 있구나. 히마리.

생각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서를 즐기거나, 시간이 되면 나가서 짧은 운동을 하는 것. 오락도, 유흥도, 어떠한 낙(樂)도 없는 나날을 보낸다는 것이 말이다. 연장을 들어 휘두르거나 느지막한 새녘의 도쿄를 가로지르는 것이 일상이었던 카즈토라에게 이러한 일상은 고역이었다. 누렇게 물든 벽지를 응시하는 것도 이제는 지겨워질 그때, 카즈토라는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나는 온전히 그녀를 밀어낼 수 없는 걸까?'

이 의문은 무료했던 카즈토라의 일상에 변화를 주었다. 식사 시간에도, 유일하게 하루 중 고대하던 운동 시간에도, 잠들기 전에도 온통 이 의문에 사로잡혀 해답을 찾으려고 애썼다.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추가되어야 할 것 같은 어려움. 그리고 왠지 모를 이 답답함이 카즈토라의 가슴 언저리를 꽉 얽매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히마리의 편지를 집어 들어 정독하고, 또 정독했다. 정갈한 필기체가 이제는 눈앞에 아른거렸고, 부드러운 어투가 귓가에 맴돌았다. 매주 보내오던 모든 편지를 몇 번이고 다 정독한 카즈토라는 드디어 이 난제의 해답을 구하게 되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하고도, 명확한 해답이었다.

나 역시 히마리와 같은 마음이구나.

히마리를 향한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녀를 향한 모든 사고회로가 바뀌게 되었다. 매주 주말 일찍 눈을 떠 도시락을 싸는 것도, 전철을 타고 약 사십 분 정도 와야지 도착하는 이 음습한 곳에 매주 와서 애정 듬뿍 담긴 언사를 내뱉는 것도, 카즈토라의 모진 언행에도 굴하지 않고 따사로운 봄날 머금은 미소로 화답하는 것도 전부 순애(純愛)였구나. 가장 순수하고,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랑. 바보 같은 카즈토라가 본인의 마음 하나 자각하지 못해 히마리는, 이제는 나의 소중한 그녀는 셀 수 없는 밤을 앓고 또 앓았구나. 본인도 모르게 벅차오르는 이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해 편지에 꾹꾹 눌러 보냈구나. 절대로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뒤집어쓴 저에게 언제나 따스한 품이 되어줄 나의 봄을 나는 지금까지 몰라봤구나. 카즈토라는 고개를 떨구었다. 오묘한 감정이 그를 감쌌다. 본인을 향한 분노, 답답함. 그녀를 향한 후회와 죄책감까지...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회신하고 싶었다. 그동안 착신 하나 없던 부재중통화에 응답하고 싶었다.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거는 전화.

있지, 히마리. 나의 하츠코이(初恋)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였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너의 따사로운 미소를 소장하고 싶은데.

첫사랑에 빠진 소년은 서툴렀고, 또 성급했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게.


카즈토라는 문학파 소년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위해 편지를 쓴 적도, 애정 듬뿍 담긴 필체를 눌러 담아 보낼 일도 전혀 없었으니까. 소년원에 입소하게 된 이후로 처음으로 드는 펜이다. 이 벅차오르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일방향이 아닌 너의 마음을 지금이라도 받아들이고 싶다는 복잡한 마음을 어떻게 정갈한 활자로 눌러 담아야 할지. 마음만 잔뜩 앞서서 머리를 따라갈 수 없었다. 언제나 날 걱정해 주는 히마리에게. 편지의 도입부만 끝마쳤는데도 벌써부터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답지 않게 왜 이러지. 불규칙적으로 박동하는 심장을 겨우겨우 잠재웠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펜을 잡았다. 지금부터 써 내려가는 모든 활자는, 내가 지금까지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약소하게나마 표시하는 거니까. 어떠한 필터링 없이 빠르게 써내려가는 모든 언사는 전부 카즈토라의 첫사랑, 히마리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내준 도시락은 잘 먹었어. 늦었지만 감사인사를 전할게. 매주 찾아오느라 힘들지 않았어? 겨울의 초입부인데, 옷 따스히 입고 와. 매번 힘든 걸음 감내해 주어 고마워. 지금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한 일과, 고마운 일을 전부 다 이 편지에 써 내려갈 수는 없지만... 고마워.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줘서,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나에게 손을 뻗어주어서, 내가 다시 출소해도 돌아갈 사람이 있어서... 그리고 미안해. 너의 그 소중한 마음에 응답해주지 못해서. 그 앳된 미소에 화답해주지 못해서. 너의 사계의 동반자가 되어주지 못해서... 늦었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너의 곁을 지켜주고 싶어.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나의 사계를 너에게 쥐어줄게. 나의 시간과 나의 현재와 미래까지 전부 다 너의 것이 되는 거야. 늦었지만, 히마리. 나는 너를...

술술 써 내려가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사랑해'라는 말만 남았는데도 차마 이 글자를 써 내려가기 힘들었다. 펜이 무거워지는 것 같았고, 숨통은 턱 막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정신없이 쏟아낸 마음의 결과는 꽤나 복잡했다. 뒤로 갈수록 점점 휘날리는 필체와, 직설적인 단어들의 나열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과연 나는, 히마리에게 사랑을 고할 수 있을까? 밀어내고, 배척하고, 거부하고, 부정하고. 순수한 애정을 지금까지 밀어냈는데 이제야 받을 자격이 있을까? 난 애초에 그녀의 애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시간은 느지막한 오후를 넘기고 있었고 땅거미가 카즈토라의 목덜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뉘엿뉘엿 지는 해와 함께 그림자는 드리운다. 펜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군다. 유약한 종잇장은 카즈토라의 손길에 힘없이 조각이 되어 공중에 흩뿌려진다. 그대로 털썩, 힘없이 바닥에 드러눕는 카즈토라의 수륜은 정처 없이 흔들리다 결국 누렇게 물든 벽지로 다시금 향했다. 언제 나는 떳떳하게 네 앞에 설 수 있을까. 네 웃음을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네 애정 다분한 언사를 한 번이라도 더 들어볼 수 있다면, 네 고백을 한 번, 딱 한 번 더 들을 수 있다면...

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찾아갈게.

목이 차가워 보여, 히마리. 목도리는 꼭 챙겨서 와.


ⓒ 츄 님

DALB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