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Precious

짝사랑이란 말이지, 고되었다.

회신 하나 없는 마음을 붙들고는 꺼지지 않는 불씨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언젠가는 그 역시 내 손을 붙잡고 '사실은 너와 같은 마음이었어'라고 말해줄 거라는 최면을 걸고, 또 걸고...

 

우리는 어렸고, 그만큼 불안정했어. 이성과 본능의 소용돌이 중간에서, 어떤 것이 옳고 그름인지 차마 가려내지 못해 나의 본능을 신념으로 삼고 그를 이정표로 지정해 앞으로 나아가리라... 다섯의 하네미야 카즈토라와 츠유하라 히마리 역시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처 없이, 그저 그들만의 신념을 이정표로, 등불로 변환시켜 이 폭풍이 한순간이라도 빨리 잠들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이 폭풍이 조금 더 버겁게 다가오는 사람 역시 있기 마련이지. 츠유하라 히마리의 첫사랑은 꽤나 지독하고 힘든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온 소꿉친구이자 타칭 양키... 하네미야 카즈토라. 그녀의 소꿉친구이자, 첫사랑을 맡고 있는 지독한 존재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이크에 올라타 도쿄를 누비고, 몇 대 몇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여러 싸움에 참전하여 다치는 일도 빈번했으니... 언제나 차분하고, 조용한 츠유하라 히마리와는 상반되었다. 누가 알기라도 하면 어머, 츠유하라 씨, 진심일까? 츠유하라 씨 답지 않네...라는 답변이 돌아오겠지. 그렇지만 츠유하라의 마음은 언제나 올곧게 뻗어 나갔다. 내가 카즈토라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어. 이 폭풍이 지나면, 주변이 고요해지면...

 

'히마리,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너와 연인적인 감정으로 엮일 일 전혀 없다고...'

 

일곱 번의 고백, 일곱 번의 거절... 칠전팔기라는 속담이 있지 않았나? 이제는 모르겠다. 그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고, 우레가 야천을 뒤흔들던 그날, 하네미야는 매번 그랬던 것과 달리 더 매몰차게 거절의 언사를 전했다. 여섯 번이나 거절을 했지만 끈질기게 본인을 좋아한 것 때문일까, 아니면 궂은 날씨를 뚫고 찾아온 제 눈앞의 츠유하라 때문인 걸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하네미야는 츠유하라와 고운 언사로 대화 나눌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싫다고 했잖아, 왜 자꾸 따라붙는 거냐고. 이러면 나도 정 떨어질 수밖에 없어...

 

말하다 보니 너무 심한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예전처럼 우리는 친구잖아, 히마리. 연인은 어울리지 않아...라고 말하면 될 것을, 너무 심하게 말이 나가버렸다. 에잇, 나도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하네미야는 뒤돌아 먼저 발걸음 옮겼다. 연한 노란색 우산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꽈악 붙잡고 있는 츠유하라를 뒤로 하고.

 

늦은 새벽까지 폭풍우는 계속 되었다. 연락을 해볼까 하다 병 주고 약 주는 격이라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그 생각 고이 접어 버리기로 했다. 베개에 얼굴 푹 파묻고는, 에이, 참... 신경 쓰이게 자꾸만 뇌내에서 맴돌아. 수신할 이 없는 혼잣말이 공중에서 맴돌았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채 알아내지 못했을 때, 느지막한 새벽이 찾아왔다. 다섯 시 언저리 되는 시간, 하네미야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폭풍우가 지나간 하늘은 어느 때보다 진했고, 그 푸르름의 농도는 짙어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지... 아직도 창밖에서 토독, 토독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부슬비가 내리고 있나 보다, 판단을 지을 수 있었다. 멍하니 침상에 걸터앉아 창밖을 응망 하던 하네미야는, 문득 어젯밤의 일이 뇌내를 스쳤다. 매몰차게 내뱉었던 언사들, 그 애가 지었던 표정, 유난히 거셌던 전날의 폭풍우까지. 전부 다 하네미야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요소들이었다. 오늘은 사과해야 할까, 답지 않은 고민을 하며 집을 나서던 그날. 그 아이가 여느 때처럼 하네미야를 향해 손을 흔들며 찾아올 것 같던 그날.

 

츠유하라는 돌아오지 않았다.

 

去り人達のワルツ

 

떠나는 사람들의 왈츠

@belonginkurage

 

츠유하라 히마리의 죽음.

 

참으로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나열이었다. 분명히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모여 이루어낸 문장을, 하네미야는 거부했다. 더 이상 익숙한 초인종이 울리지 않는 것도, 식사는 챙겼냐는 메시지가 수신함에 없는 것도, 더 이상 약속을 잡을 사람도 없다는 것을 부정하곤 했다. 언젠가는 나타나겠지. 아무렇지 않게 본인의 앞에 나타나서 식사는 챙겼어? 카즈토라 군...이라는 말을 해줄 거라고. 귓가에 망령처럼 맴도는 바람 소리가 이토록 미운 적이 없더라. 

 

휴대폰의 진동이 울린다. 혹시 몰라, 하고 휴대폰을 확인해 봤지만 결국에는 현실로 끌려오게 되었다. 장례식장 위치와 와달라는 문자. 결국에는 현실이었다. 휴대폰의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리고 검게 물들 때까지... 하네미야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옷장 속에 검은 옷이 몇 벌 있었나,라는 생각만 할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 놓인 국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는 이런 꽃보다 샛노란 봄의 꽃이 더 어울리던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살아생전 꽃은커녕 좋은 말 한마디 해주지 못했기에, 하네미야는 죄인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준 건 없지만 받은 게 너무 많았다. 돌려주기도 전에 아스라 져버렸다.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전에 져버린 나의 사랑아. 품에 안기도 전에 시들어버린 나의 봄꽃아.

 

장례식장에서 본인의 사랑을 깨달아버린 모습이란.

 

가해자는 음주운전을 한 어느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유난히 기분이 좋아서, 유난히 과음을 해서, 그런데 기분이 좋아서 스스로 운전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운전대를 잡아버린 그 사람에 의해 한 소녀의 인생이 산산조각 났다. 그녀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전부 다 아스라 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이 손상되어 시신조차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던 하네미야에게, 츠유하라의 장례식 5일은 괴롭고 또 괴로웠다. 작고 가녀린 봄꽃이 한낱 불길에 휩싸여 재밖에 남지 않은.

 

더 이상 인사할 수도 없고,

웃음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나의 첫사랑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은 머금고 지내기로 했다. 가끔씩 식도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에 견디지 못해 허공에다 대고 사랑해, 읊조리지만 결국 소용없었지. 주어 없는 고백은 잔인했다. 대상 없는 사랑은 곤욕이었다. 너는 어떻게 이걸 견뎠을까. 모진 말이 돌아와도, 좋아해, 또 좋아해를 말간 표정으로 내뱉던 너는.

 

몇 달 동안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자꾸만 빗속에서 힘없이 나아가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맨 정신으로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술병을 높게 든 것도 수어번. 허나 한계가 있었던 건지 스스로를 작은 방 한 칸에 몰아넣어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귓가에 맴도는 그녀의 목소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 차마 숨조차 쉬지 못했던. 나아가면 아스라지고 다가서면 물러나는 몽중 속의 츠유하라를 붙잡으려 온 밤을 지새우던 카즈토라에게 현실이란 감옥이었으니까. 

 

 

그날도 비가 참 많이 왔다.

 

비가 오는 날은 이제 하네미야의 악몽이 되었다. 비가 세차게 오는 날에는 제대로 수면에 들지도 못해 알코올의 힘을 빌려 겨우겨우 눈을 감곤 했다. 그렇지만 그마저도 잠시. 본인이 스스로 마주하지도 않은 그녀의 사고가 뇌내에서 수백 번, 수천 번 리플레이되어 깊은 새녘에 혼자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곤 했다. 아마도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속죄양. 짊어지지 못할 망정 울부짖다니... 참으로도 이기적이었다. 고통 속에서 눈을 감아갔던 그녀의 심정에는 발끝도 도달하지 못하는 주제에.

 

차마 맨 정신으로는 폐안하지 못해 그날도 알코올을 갈망하던 하네미야의 뇌리는, 자연스럽게 그를 편의점으로 이끌었다. 편의점에 왕래하는 것 말고는 절대로 외출하지 않던 하네미야의 일상. 이날도 어김없이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익숙한 골목을 돌아,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골목 안을 어렴풋이 바라보면...

 

응? 저게 뭐지, 낯선 광경이 하네미야의 눈을 사로잡았다. 거뭇거뭇한 어떤 형체가 이쪽으로 재빠르게 당도하고 있었다. 길고양이인가? 하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려던 하네미야의 바짓춤을 붙잡는 그 무언가에, 하네미야는 길고양이가 아님을 직감했다. 보들보들한 감촉,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는 숨결. 그래, 이것은...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다섯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 그런데 이 아이가 왜 골목에서? 하네미야는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히 집에 돌아가서 맥주 한 캔을 다 마셨어야 하는 시간임에도 맥주는커녕 집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슬슬 짜증이 밀려왔지만 차마 그렇다고 말하지도 못하는 격. 우선은 제 눈앞에 보이는 어린아이를 달래주거나 부모를 찾는 것이 도덕에 맞으니 그리 하기로 하였다. 저기, 혹시 부모를 잃어버린 거니... 피곤에 서린 성음과 함께 하네미야는 쪼그려 앉아 그 의문의 어린아이에게 눈높이를 맞췄다. 그렇게 해야지 대화를 하더라도...

 

... 어?

 

어라, 이럴 리가 없었다. 어린아이와 마주한 순간 하네미야는 더 이상 어떠한 말도, 어떠한 행동도 행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도 힘든 순간이었다. 마구 흔들리는 수륜과, 어떠한 말도 이어나가지 못하는 그 답지 않은 모습. 그것도 그럴 것이... 하네미야의 앞에는 그 어린아이가 서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어 하고 또 그리워하던, 미안함과 애정이 공존하던, 다시 둘이 만난다면 그것은 분명 사후세계라고 굳게 여기던 하네미야의 하나뿐인,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밖에 없을 그녀...

 

츠유하라 히마리.

그래, 츠유하라를 똑 닮은 소녀가 하네미야의 앞에 서있었던 것이다.

 

 

... 이름이 뭐니?라는 간단한 질문에는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더라. 분명히 그때 츠유하라를 똑 닮은 소녀를 만나서, 어찌할 줄 모르다가... 아마도 춥다는 대답에 본인의 집까지 데리고 오게 되었던 것 같다. 이 모든 것은 한순간에, 그것도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던 탓에 하네미야 본인도 제정신을 찾아오지 못했다. 본인이 그리워하던 사람이 아이의 모습으로 환생한 것일까?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환생해서 약 다섯 살의 나이를 먹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몇 달 사이에 그녀가 환생하여 다섯 살 정도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이로 자라지는 않을 거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적으로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생각을 해봐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작정 혼란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우산도 없이 골목을 누비고 다녔을 거니까. 우선 보일러를 틀고, 물 온도를 맞추고, 아, 이 나이대의 아이를 위한 옷 한 벌도 없는데...

 

'제가 불편하시다면, 나갈게요. 괜찮아요.'

'... 어?'

'제가 불편하다면,... 걸림돌이 될 수 있잖아요. 걱정 마세요. 저는 나가도 괜찮아요.'

 

저 작은 체구에서, 연약한 마디 하나하나에서 어떻게 저런 말이 나올 수가 있을까. 다섯 살이라고 하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본인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나이인데, 그래야만 하는데... 어쩌면 하네미야는 그때 눈앞에 있는 소녀에게 누구를 봤을까. 하네미야 본인의 어린 모습일까, 아니면......

 

'걸림돌은. 이 나이대의 애들은 어떤 옷을 입는지 몰라서 서있었던 거야. 걸림돌 아니니까 걱정 마.'

 

자신은 하나도 없었지만 우선 그렇게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때 하네미야는 결심하지 않았을까. 눈앞에 있는 소녀에게 본인이 버팀목이 되어주기로. 적어도 본인과는 다르게 가정이라는 공간이 지옥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만들어주겠다는 이기적이고도 힘든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무모한 마음이 그런 말을 하게 이끌었는지는 몰라도, 하네미야는 결코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저 놔주기에는, 그녀는 너무나도 츠유하라를 닮았으니까.

 

그녀의 이름을 본떠 히마리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히마리는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무작정 집을 나왔다고 했다. 허나 어린아이가 집을 나와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를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작정 골목 사이를 누비다 보니 하네미야를 만났다고 말했다. 본인을 만났으니 망정이지, 만일 범죄에 손길에 길들여진 사람과 마주치면 어떡할 뻔했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히마리를 볼 때마다 츠유하라가 생각났고, 츠유하라를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잔소리는커녕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어쩌다 보니 히마리의 보호자가 되어버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시 부모에게 돌아가게 된다면 가정폭력에 노출될 것이 뻔하고, 만약 그게 아니라면 갈 곳은 보육원밖에 없었으니 선택지는 그다지 많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히마리는 너무나도 츠유하라를 닮았으니까. 히마리에게 츠유하라를 겹쳐 보는 것은 가장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쉬이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웃는 모습, 잠든 모습, 본인을 부르는 모습까지 전부 다 츠유하라를 닮았으니까. 마치 하네미야의 인생에 나타나 죄책감을 증가시키려 작정한 신의 교활한 선물 같으니까.

 

히마리가 잠들 때 하네미야는 옆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응망 하기만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완이를 내비치거나 눈에 담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응망 하다 보면 어렴풋이 츠유하라가 보이는 것 같았다. 만약 츠유하라가 살아 있었다면, 이라고 시작한 하네미야의 생각은 가지를 펼치고 잎을 틔워 결국 매일 밤 츠유하라와 히마리에 대한 생각으로 나무 한 그루를 틔우곤 했다. 이러다가 수목원이라도 뇌내에 만드는 게 아닐까,라는 실없는 생각도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새벽 세 시를 지나치곤 했다. 야속하기도 하지... 조금 있으면 또 아침을 짓고, 옷을 챙겨주고, 등원을 시켜줘야 하고...... 어라, 나 꽤 부모 같지 않아? 하네미야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처음에는 머리 하나 묶어주는 것도 어려워 대강 삼십 분을 전전긍긍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땋은 머리도 문제없이 하는 본인의 모습이 조금은 웃기고 대견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는 당장이라도 인생을 포기할 것 같은 폐인의 모습으로 지내왔는데, 이제는 어엿한 보호자가 되었다니. 무엇보다도 츠유하라를 닮은 히마리의 모습 때문에 무턱대고 데려온 것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어릴 적의 본인과 겹쳐 보였기 때문, 이라는 이유도 있는 걸까. 사실 잘 모르겠다. 하네미야는 본인을 몰랐다. 예전부터 본인의 욕망은 뚜렷하게 직시하고 있었지만 본인의 심리 상태는 잘 알지 못했다. 천리 길은 알아도 사람 속 하나는 모른다는 옛말처럼 하네미야는 본인의 행동에 대한 이유도 아직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죄책감 때문에 네가 맡고 있는 게 아니야? 어쩌면, 이 아이를 돌보다 보면 네 죄책감이 씻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어쩌면.

네 행동에 후회해서 한 번만 더...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

어쩌면.

 

수많은 가설이 뇌내를 스쳤지만 결코 정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이렇게 지새운 밤이 몇일이더라. 내가 잃은 수면 시간은 도합 몇 시간이더라. 내가 지금 낭비하고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되더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생각은 결국 썩은 동아줄이 되어 어느 지점에서 끊기더라. 아, 아침이구나... 푸르스름하게 밝아지는 하늘을 보며 하네미야는 생각했다. 아침 차려야겠다.

 

히마리는 발레를 좋아했다. 별다른 계기는 없었고, 약 일 년 전에 시내에 나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발레 공연 포스터에 빠졌다는 간단하고 명료한 이유였다. 이 나잇대의 아이들은 주로 꿈을 쉽게 가지고, 또 쉽게 바뀌지 않던가. 터무니없게 과학자가 되겠다는 아이는 그 다음날 건축가가 되고 싶다 말하고, 용이 되고 싶다던 아이는 결국 선생님이 되더라. 이렇게 아이들의 어릴 적 꿈은 크게 귀담아들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하네미야는 달랐다. 누구보다도 발레를 사랑하던 그 아이, 조금의 시간이 더 주어졌더라면 분명히 아름다운 백조가 되어 날아올랐을 것을 자신할 수 있는 그 아이를 생각하면 결코 히마리의 말을 무시하고 넘길 수는 없었다. 발레, 한 번 배워볼래? 하네미야는 되물었다. 히마리의 들뜬 웃음이 모든 걸 알려주고 있었다.

 

너는 참 닮았구나. 그 아이랑.

 

아니나 다를까, 히마리는 발레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물론 사람은 천성이 있고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실력이 이 정도로 늘 수 있다는 건 천성을 뛰어선 운명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본인도 이것을 분명히 즐기고 있고, 이토록 행복해하는데 시키지 않을 이유가 더 있나요?라는 말에 하네미야는 아무런 첨언을 덧붙이지 않았다. 예술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돈이 많이 들까,라는 생각을 하기 바빴기에...

 

히마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그 애는 츠유하라와 더더욱 흡사하게 자랐다. 곱슬기 약간 첨부된 갈색빛 머리칼, 가장 말간 어느 여름날을 몰래 담은 듯한 수륜, 해바라기 사이에서 뛰놀아야 적합할 듯한 완이까지... 무엇보다도 발레를 하며 행복해하던 그녀의 모습은 츠유하라와 닮다 못해 츠유하라를 가리키고 있었다. 철없던 시절, 미처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건만 그때의 츠유하라는 이런 표정을 짓고 있겠구나. 본인이 미처 보지 못한 츠유하라의 순간을, 히마리를 통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이가 들수록 투자해야 하는 돈도 늘어났고, 힘들지 않았다면 분명히 허언이었다. 예체능 쪽으로 진학하는 건 생각보다 힘들더라. 재력과 부가 우선인 세상에서 히마리를 그 아이들만큼 예쁜 꽃으로 자라나게 서포트하는 건 말하지 않아도 힘들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도 하네미야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피기 전에 져버린 꽃망울을 다시 보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이 웃음을, 본인만을 바라보며 자라나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포기는커녕 불평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하네미야는 종종 히마리의 등에 대고 츠유하라, 부르곤 했다. 둘 다 히마리로 부르면 본인부터 혼동이 올 것 같아 그녀의 성을 입에 담기로 했다. 아무도 따라 할 수 없고, 아무도 떼어갈 수 없는. 보고 있음에도 그립고 그렇기에 더 앓고 있는 나의 마지막 사랑아.

 

츠유하라와 히마리를 겹쳐 보지 않도록 철저하게 마음을 따로따로 떼어놓곤 했다. 히마리 앞에서 츠유하라의 이야기는 한 번도 꺼낸 적 없었다. 혹시 몰라 히마리에게도 본인을 삼촌이나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말했고, 한 번도 본인의 이름을 호명하게 하지 않았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건 너무나도 두려웠다. 아직도 츠유하라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데, 차마 히마리의 목소리로 본인의 이름을 호명하는 건 너무나도 큰 고통이자 두려움이었다. 지금 듣지 못한 말들은 나중에 다시 재회하면 꼭 들으리, 지겨울 정도로 들어도 괜찮으니 꼭 한 번만 더 불러주기를.

 

카즈토라 군!

 

오늘따라 듣고 싶어 사무치던 말 한마디가.

 

 

 

히마리는 국립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가 되었다. 역시 재능을 지닌 사람들은 다르나 봐요,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온 히마리의 최후는 이토록 아름다웠다. 본인이 사랑하는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으니까... 본인의 첫 데뷔 작품을 준비하면서도 히마리는 카즈토라에게 꼬박꼬박 연락했다. 오늘은 이런 연습을 했는데, 역시 국립 발레단이라 그런지 모두 다 뛰어나더라. 더 자극이 되어 열심히 연습했다.라는 짧고 간결한 문자 끝에는 꼭 하네미야의 안부를 물어봐주곤 했다. 아저씨는 잘 지내시죠? 다음 주에 첫 공연을 하는데, 꼭 보러 와주세요. 이대로 끝난 문자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히마리의 등을 보며 계속 떠밀어 주다 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되었더라. 어느새 하네미야 역시 나이를 먹었고 히마리 역시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얄팍한 책임감에서 시작된 일은 결국 한 송이의 꽃을 틔울 때까지 이어졌으므로. 이제는 누가 뭐라 해도 어엿한 히마리의 보호자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만하지 않기로 했다. 본인은 언제까지나 츠유하라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에 비롯된 감정으로 히마리를 대했으며, 츠유하라가 이루지 못한 꿈을 히마리가 이뤘으니 그걸로 본인의 역할은 끝났다. 숨 쉴 틈도 없이 달려오다 보니까 이제 본인의 생활로 돌아가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히마리가 없는 하네미야만의 삶은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목표로 살아야 할지는 지금부터 정하는 일이지만... 고되었다. 거의 이십 년을 쉼새 없이 달려왔는데 조금만 쉬면 안 될까.

 

로미오와 줄리엣은 고전적인 작품이기도 하고, 발레단 역시 애정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세계적인 작품의 주연이 히마리라니... 본인 역시 들떠 몇 달 전부터 열심히 준비했기 때문에 첫 데뷔 무대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이상하게도 겨울이지만 해바라기를 꽃다발로 엮어 주고 싶더라. 늘, 항상 해바라기처럼 무한한 열정과 따스함을 지니고 있는 히마리니까. 해바라기를 구할 수 있는 꽃집은 없었지만 예약 주문까지 해서 해바라기 꽃다발을 쟁취해 냈다. 좋아하면 좋겠네. 겨울이지만 본인이 준비한 해바라기의 의미를 누구보다 더 잘 알아주기를 바라며.

 

어떨 때는 백조와도 같고, 어떨 때는 가벼운 한 마리의 종달새 같았다. 발끝에 본인을 맡겨 수천 명의 사람들 앞에서 아름답게 비상하는 히마리의 모습은...... 여러모로 하네미야에게 여운을 남겼다. 골목에서 처음 마주칠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아름답게 비상할 일만 남았구나. 보호자로서의 뿌듯함도 분명히 있었지만 가슴 한편에는 츠유하라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녀도 이렇게 날아오를 수 있었을까. 만약 그날 츠유하라의 고백을 받아줬다면 지금 둘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지금보다는 더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어쩌면, 만일 그랬다면...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이 많아졌다. 츠유하라 역시 이 작품을 좋아했는데. 언젠가는 꼭 이 작품을 보러 오자고 어렴풋이 말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기억도 흐릿해졌다. 기억의 잔재 저 너머로 아스라진 둘만의 기억과 추억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산유물이 되어버렸다. 큰일 났네, 이제는 츠유하라의 목소리도 가물가물했다. 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는데. 오래된 카세트테이프에 넣으면 언제나 재생될 것처럼 되뇌고 또 되뇌던 그녀의 목소리가...

 

공연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고, 클라이맥스 장면이 되어서야 하네미야는 다시금 정신을 다잡았다. 그 순간, 누구보다 높게 비상하고 있던 히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저 푸르른 수륜과 말간 희소. 어쩌면 네 목소리가 기억날 것 같아, 츠유하라. 아니, 기억해야 할 것 같아. 이제는 더 이상 마주하지 못할 저 희소를 마주하기로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구보다 활짝... 웃었다. 하네미야는 히마리와 마주 웃었다. 츠유하라에게 웃어주지 못했던 수많은 나날과 순간을 합해.

 

츠유하라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만날 수 있더라면 하고픈 단 한 가지의 일을 지금까지 정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정해진 것 같았다. 자신이 한 번도 해주지 않은 행동, 그렇기에 더더욱 후회되고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은 하나의 행동을...

 

나는 너에게 밝게 웃어줄 거야. 그러지 못했던 만큼 더더욱. 예전의 후회와 죄책감 담아서 가장 밝게. 누구보다, 누구보다도 더...

보고 싶어, 츠유하라.

 

공연은 성황리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이후에도 총 삼일이나 더 이어지는 공연에 아직은 자만할 수 없지만, 첫 단추를 잘 꿰맸으니 히마리 본인도 뿌듯함을 느끼겠지. 수많은 찬사 속에서도 히마리는 바삐 단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앉아있던 것을 보았는데, 왜 안 보이는 거지? 어디 간 건가? 대기실에 먼저 가있겠다는 말도 없었는데... 수많은 찬사와 꽃다발을 제치고 히마리는 곧장 그 좌석으로 뛰어갔다. 어느 때처럼 본인을 향해 무표정으로 뭐 해? 가자,라고 말할 하네미야를 찾으며.

 

... 아저씨?

 

공중에서 흩어지는 대답 없는 부름. 응답 없는 외침은 고요 속에서 조용히 흩어졌다. 만남도 특별했지만 그만큼 헤어짐도 특별해야 했던 것일까. 아무런 말 없이, 예고도 없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여준 웃음과 함께...

 

작별인사는 해바라기로, 이것은 그들만의 법칙이었다.

 

 

 

츄 님

DALBOM